"눈부시게 초록인 순간"... 제주에서 만나는 자연의 품

오름의 품, 자연의 극장
제주 숲길 여행지, 아부오름

제주에는 수많은 오름이 있다. 그 중에서도 높지 않지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오름이 있다. 바로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에 위치한 ‘아부오름’. 입장료도 없고, 번잡함도 없는 이 오름은 마치 조용한 연극 무대처럼 자연이 펼쳐낸 초록의 공간이다.

‘아부오름’이라는 이름은 ‘앞오름’이라는 뜻의 전악(前岳)에서 유래되었다. ‘아부’는 ‘아버지’ 또는 ‘어른’을 뜻하는 의미로도 읽힌다. 실제로 오름의 전체적인 형태가 믿음직한 어른이 두 팔을 벌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닮아 있어, 이름만큼이나 풍경에서도 포근함이 느껴진다.

제주 아부오름
사진 = ⓒ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-장재혁

이 오름의 매력은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다는 데 있다. 높이는 약 301m로, 오름 초입에서 정상까지 천천히 걸어도 15~20분이면 닿을 수 있다. 오름치고는 경사가 완만하고 길도 부드러워,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누구나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산책 코스다. 이 짧은 오름길 끝에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.

제주 아부오름
사진 = ⓒ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-김진규

아부오름의 정상은 흔히 볼 수 있는 평탄한 능선이 아니다. 정상에 다다르면 거대한 함지박처럼 움푹 파인 굼부리가 나타나고, 그 안에는 빽빽한 삼나무들이 원형으로 자라난 숲이 들어차 있다.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 풍경은 마치 초록빛 원형극장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. 그 울창함과 단정한 곡선이 어우러져 감탄이 절로 나온다.

제주 아부오름
사진 = ⓒ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-두드림

이곳의 굼부리는 시간과 자연이 함께 만든 조형물이다. 한 번 들어가 보고, 다시 위에서 내려다보고, 바람에 스치는 나무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머물고 싶어진다. 사람들 발길이 많지 않아 조용하고,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가득한 그 풍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마음도 차분해진다.

제주 아부오름
사진 = ⓒ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-두드림

아부오름은 식생도 다양하다. 오름 전체는 넓은 풀밭으로 덮여 있으며, 그 안에는 제주 특유의 나무와 야생화들이 자리하고 있다. 상수리나무, 보리수나무, 삼나무뿐 아니라 계절마다 피어나는 송양지꽃, 풀솜나물, 향유, 쥐손이풀, 찔레꽃, 청미래덩굴 등이 곳곳에 퍼져 있다. 이 작은 식물들이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려준다.

제주 아부오름
사진 = ⓒ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-두드림

특히 초여름부터 가을까지는 야생화가 절정에 이르며, 억새가 일렁이는 가을 오름길은 제주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을 만들어낸다. 초록의 정점에서 갈대빛으로 옮겨가는 변화는 걷는 사람에게 계절을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.

산책 중에는 중간중간 쉬어갈 수 있는 바위들이 있어, 도시처럼 조성된 공원이 아닌 ‘있는 그대로의 자연’이 준 여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. 정상에서 굼부리를 바라보며 잠시 눈을 감고, 제주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해보는 그 순간, 이곳이 단순한 오름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.

제주 아부오름
사진 = ⓒ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-두드림

아부오름은 특별한 체험이나 화려한 시설이 있는 곳은 아니다. 하지만 제주 본연의 모습, 오름이 품은 고요한 아름다움을 가장 순수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. 혼자 걸어도 좋고, 누군가와 나란히 걸어도 좋다. 말이 없어도 되는 길, 풍경이 대화를 대신하는 그런 길이다.

제주 동부 지역을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, 아부오름을 지도에 조용히 하나 표시해두자.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아 더 좋은, 입장료 하나 없이 자연이 선물처럼 안겨주는 이 공간은 분명 제주에서 가장 따뜻한 기억 중 하나가 될 것이다.